[뮤즈 모임] '동그라미'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

소재는 동그라미

권호 기자

작성 2019.12.06 23:25 수정 2020.02.20 21:30

<출처: unsplash>



[뮤즈: 장윤재 작가]


네모난 방 한 켠

침대에 누워

나는 끝없이 침전한다.


흩날리는 종이의 유연한 움직임

그 속에 정답은 없다.


붉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바닥을 치고

더 이상 동그라미가 아닌 것과의 조우


이제는 동그라미가 아닌 것을

나는 사랑해야지


한 까치 담배에 불을 붙이고

어두운 천장에 별을 수놓는다.




[뮤즈: 정진우 작가]


세계의 별을 만드는 방법
- 동그라미

ㅇㅇ 
ㅇ-ㅇ
ㅇ0ㅇ
ㅇㅇ
...

발목에 걸린다
돌로 만든 갈퀴처럼
날카롭고 묵직하다
정으로 다듬는다 
정이 웃는다
슬픈 눈은 
일찍이 구로 되어있었다
동그라미였다 
눈에 눈물이 떨어진다
어떤 형태이던 상관없다
물은 강이 되어 바다를 이룰 것이다
그 틈으로 나는 거북이가 된다




[뮤즈: 심규락 작가]


<물의 수녀원에서의 뇌 수술> 

반포동에 드리운 음지의 단칸방
어디선가 차분한 드릴 소리가 밀물로
이곳 물의 수녀원은 은빛의 원으로 찬다
그것도 원주율만큼 유한히도 무한하게

이 밤, 이깟 나보다도 빛을 잃지 않은 주화를 건네면
차가운 의사는 알았단 듯이 냉큼 수술을 집도하지

지켜본다, 보고 있다
정확히는 쳐다본다
그리고 나의 뇌를 내어준다
그리 두꺼운 두개골을 활짝 개폐

뇌간을 파충류만큼 잘라낸 이들이 모두 숨을 죽이고
별의 핀조명에 눈이 먼 소뇌는 나의 어떠한 운동도 잡아둔다

흙에 물든 나의 삶 따위 같은 대뇌를
둥둥 뇌척수액에 담가본다
정확히는 권장용량을 초과한 천의 얼굴들을

둥그런 수술대 안, 얄밉게도 치사한 해마가
새하얗게 유영을 하지, 가루이든 발자취이든
무어라도 어떻게든 훠어이- 풀어졌음 좋겠다만
두드 두드 두드러엄 그 낙차와 질량을 통해서 말이다만

돈다, 내가 아닌 식염수가 중심인 O에서
돌고 돈다, 모난 곳이 없다는 듯이 원 마냥 윤회하는 척
돌아간다, 뒷짐을 진 채 겉으론 산뜻하게
실은 돌아서 간다, 검은 땀은 빼놓고 우회하여 작심만 녹이도록

연수처럼 한 바퀴 꼬여버린 인생은
역시나 오늘도 좌우를 반대로 살고
그것이 팔자라면 세탁 또한 되지 않겠구나

울어본다, 울고 있다
엄밀하게는 속으로 울부짖는다
그런 뒤, 명목상 인간 다울 수 있음을 손에 쥐어본다
이 철근 바다의 멍게가 잔인한 해마를 안은 채, 자격도 없는데

불이 없는 화롯가에 나의 머리를 넣어 무미건조
모두의 얼굴이 썰물이 된 지금
입술만큼이나 굳은 검지로 체온을 올리지, 40도 이상으로
묵묵히 또는 먹먹히 차후의 불지옥을 미리 느껴본다

여기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기도하고 있겠지
비구름에 젖지 않을 내일을 살 수 있기를
밤의 실결을 다들 머리에 이고
흠 없이 동그란 달란트를 쥔 채 수술에 신실히도

한 시간 가량의 의료(衣療)적 행위가 끝이 나면
모든 것이 애써 침착히도 말라있다
도대체 언제 수분기 어리게 살았냐는 듯이

어떠한 수술을 받았던 것일까
젖은 과거에 대한 망각의 절제
아니면 찬란히 빤빤한 앞날이 될 거란 막연한 환상

실은 모른다, 방금 수술실에서 나와서
아직도 무지한 나는 그저 한 손에 비닐 보자기

뇌를 또는 나 자신을 깔끔히 도륙한 이 시점서
유일한 사실은 당분간 컵라면도 못 먹는다는 것
것도 열흘씩이나




[뮤즈: 휘게 작가]


반복된다. 익숙한 상황이 반복된다. “어디서 봤지? 이 상황 전에도 있던 상황 같은데..”
살다 보면 많은 순간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한다. 과거에도 같은 경험을 했던 것 같은 착각. 가끔은 진짜였으면 좋겠고 어쩔 땐 모든 것이 거짓이었으면 좋겠는 그런 상황들.
과거의 잘못된 선택으로 아픈 결과를 온전히 감내해야 하는 상황을 경험했었다면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선 올바른 선택을 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선택에 따른 결과가 어떨지 자명하게 보임에도 또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그렇게 시계는 돌고 돌아 시간은 나를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잡아 이끈다. 그 속에서 나오기 위해 발버둥 친다. 더 깊이 빠져 들지 않지만 나오기 위해선 그 보다 더 힘든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뮤즈: 유피린 작가]


<휴가 종료>

책 한 권 분량의 대본을 뒤적거리며 사윤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연기라고 하지만 자신과 너무 다른 캐릭터에 혼란이 왔다.
“끄응……”
그동안 해왔던 캐릭터 중에 사윤과 그렇게 일치하는 캐릭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전혀 감을 못 잡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처음 할 당시에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냥 모든 것을 내려놓고서 지른 감이 있었다. 하지만 몇 번 하다 보니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그렇기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감을 찾기에는 생각보다 오래 쉬었다.
“한 달이 이렇게 긴 시간이라고 느끼기는 처음이네.”
평소였다면 애드립이라든지 자신이 한 캐릭터의 분석으로 가득한 대본이었지만, 지금은 의미 없이 손가락으로 펜을 돌리며 고민하는 중이다.
“저기, 언제나 이런 분위기야?”
그런 사윤을 보고서 조용히 앉아있던 청년이 입을 열자, 사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달의 공백이 사윤만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는지, 다들 사윤처럼 죽일 듯이 대본을 노려보며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
“아니, 평소에는 잘 굴러가는데, 역시 휴가가 긴 것이 문제였지.”
“……휴가? 그걸 휴가라고 부를 수 있는 거야?”
“엄밀히 따지면 본업이지만- 공지를 휴가라고 올렸으니까, 휴가라고 하는 거지.”
펜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사윤이 허탈하게 웃자 청년, 창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윤이 말한 한 달의 휴가 동안 있던 소동으로 합류하게 된 창민은 지금 상황이 마냥 불편하기만 했다.
따라오겠냐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들과 만났을 때 있었던 그런 사건이 언제나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하게 된 것은 드라마와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도 뭔가 제대로 된 프로덕션 같은 것이 아닌 인터넷에 업로드해서 조회수로 수익을 내는 행위. 절대로 지난 한 달 동안 그들이 창민에게 보였던 것을 떠올리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내가 원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닌데 말이야-”
“뭘 기대했는지 짐작은 되지만, 눈 동그랗게 뜨지 말고, 좀 성격을 동그랗게 해서 봐봐. 즐거우면 그만이지.”
“성격은 몰라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심히 굴려도 즐거운 모습이 안 보이거든?”
투덜거리며 지적하던 창민은 리딩실에 붙어있는 시계를 보았다. 어느 틈엔가 약속했던 휴식 시간이 지나버렸다.
“자, 휴식 시간 끝! 한 번 맞춰보시죠!”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을 동글게 말아서 메가폰을 삼은 창민이 외치자, 대본을 노려보던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투덜거리는 것 치고는 빠져들었구만.”
그 모습을 본 사윤은 피식 웃으며 리애의 낭독에 집중했다.

*

리딩이 끝나고 다시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평소라면 다들 서로의 연기에 아쉬운 점을 지적하거나, 다시 한번 맞춰보고 싶은 것을 맞춰보며 정신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한 달 간의 공백으로 다들 고뇌에 빠졌다.
“이래서 한 번 구르기 시작한 것은 멈추면 안 돼.”
도무지 캐릭터에 몰입이 안 되는 사윤은 대본이 아닌 다른 종이를 흔들었다. 그 종이의 표지에는 ‘극비 시의 해석. 창민, 사윤, 리애 외에는 읽지 마시오.’라고 쓰여 있다.
이 드라마에 도입부에 나오는 시와 그 해석. 이것 외에도 작품에 나오는 시가 달리 많지만, 이것만큼은 각본을 쓴 저자가 절대로 해당 인물 외에는 보면 안 된다고 적었다.
작품의 저자인 경준이 한 달의 소동을 같이 보내며 쓴 것인데, 첫 번째 시만큼은 모든 촬영이 끝나기 전까지는 세 사람만 알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했다.
‘첫 번째 시는 동그라미가 주제이지만, 정작 다른 사람은 이해 못하는, 즉 구르지 못하는 동그라미거든.’
즉 작품 전체를 총괄해야 하는 감독인 창민과 모두를 이해하는 천재인 사윤, 시의 저자인 리애 외에는 몰라야 한다는 이유였기에 납득했다.
그런 시의 해석을 사윤이 흔드는 것은 지금 창민, 사윤, 리애만 따로 빠져서 상담 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석을 봐도 이 시, 이해되는 인간?”
“……이게 이해되면 그것도 나름 문제일 것 같은데.”
첫 번째 연이었던 별을 비유한 동그라미와 밤하늘을 비유한 깃발까지는 그럭저럭 이해했다. 하지만 두 번째 연부터는 작자인 경준의 머리가 의심스러워졌다.

귀를 닫으며 기울인다.
들리지 않았던
펄럭 소리가 들린다.

이게 도대체 뭔 소리야 싶은 부분이었는데, 해석이 걸작이다. ‘귀를 막으면 들리는 웅웅 소리를 지구가 굴러가는 소리에 비유한다. 즉 귀를 닫고 별이 굴러가는 소리를 들으려고 했다는 소리다.’ 이 해석에 사윤은 경준을 찾아가서 직접 별이 굴러가는 소리를 들려줄까 했다.
하지만 솔직히 그것을 못 들은 녀석이 아니기에 최대한 평범한 시선에 집중하다 보니 이런 표현이 나왔다고 납득했다.
이다음인 ‘어지러워 귀를 열었다.’는 ‘귀 오래 막고 있으면 균형 감각 흔들려서 어지러워진다.’라는 지극히 이과적인 감성이었다.
“뭐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이잖아? 걸작은 마지막이라고?”

뿔이 난 동그라미의
화난 소리.
너는 이해 못했지.

마지막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시의 마지막을 리애가 지적하자, 둘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진짜 이 시의 난해함의 끝판왕이었다.
‘우리가 동그라미라고 하는 것은 뇌가 그렇게 인식하는 거잖아? 즉 우리가 보는 동그라미라는 것은 여러 감각이 동그라미라고 판단하는 거인만큼, 내가 인식하는 동그라미의 모양은 타인이 사각형으로 인식, 즉 뇌가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그걸 설명해봤자, 결국 똑같은 동그라미로 인식한다는 의미다.’
“고작 이 3줄에 이런 정신 나간 생각을 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미쳤어.”
“……늦게 온 육아 스트레스라고 생각해주자.”
여기에서 해석이 끝인데 이유는 마지막 연은 저 느낌을 이어서 반복시킨 것이기에 생략한다고 적혀있다.
“진짜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것 쓸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모르겠어, 모르겠어. 투덜거리지 말라고, 이거 작중에서는 네가 쓴 시야.”
“……그러는 오빠는 이 시의 유일한 이해자인데?”
웃음을 주고받으며 대화하지만 두 사람의 속은 타 들어갔다. 애당초 자원한 것도 아니고 강제로 지정된 배역이었지만, 이 또한 경준이 의도한 캐스팅이다.
철저하게 이과 출신인 리애를 문과 소녀로 만들고 남들을 이해 못하는 아집 덩어리인 사윤을 남들을 이해하는 천재로 만들었다.
거기에 신입인 창민을 가장 중요한 감독에 앉혔다. 
이왕 연기하는 것 잘하는 것이 아닌 익숙하지 않은 것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조차도 주제인 동그라미에 연관된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 각본의 저자인 경준은 말이야-”
창민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다가 삼켰지만, 사윤과 리애는 그 말이 무엇인지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공감했듯이 각본을 쓸 당시의 경준은 동그라미에 돌아버린 인간이었다.




[뮤즈: 소라 작가]


네 손가락 잘근잘근

네 머리칼 잘근잘근

네 눈빛 잘근잘근

네가 준 ㅂㄱ싀사극ㅈ싖 잘근잘근


컥컥 꺽꺽

다시-다아아아ㅏㅏ시

다시

잘근잘근

잘근잘근

꺽꺽 컥컥컥ㄱ컥

잘근잘근 잘근잘근


끄윽-

-


이제 너 없이도

나는 네가 되었다


저기 동그란 무덤 앞에

흰꽃이 피었다.




[뮤즈: 심스 작가]


<동그라미 그리기>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원을 그렸던 것이...
갓 태어난 아기 때부터 그는 손을 끊임없이 공중에 휘저었고, 그것이 반복되는 동그라미라는 것을 부모는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 아기가 연필을 쥐기 시작한 이후, 이제는 세상 모든 것이 그 아이의 도화지가 되어버렸다. 바닥, 벽, 집 천장, 집 안의 모든 가구들……. 모든 곳들이 그가 그린 동그라미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집에 더 이상 그릴 곳이 없어지자, 아이는 밖에 나가 닥치는 대로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 건물 벽, 정원, 인도, 도로, 심지어 남의 자동차 위에까지 그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부모는 그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아이가 그린 동그라미를 계속 지워갔지만,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동그라미를 그렸다.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이 마치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인 것처럼, 그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또 그렸다.
아이는 차츰 자라서 어느새 성인이 되었다. 하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가 하는 일은 끊임없는 동그라미 그리기의 반복이었다. 그에게 타협은 없었다. 동그라미가 조금만 찌그러지거나 어긋나도 그는 지우고 다시 그렸다. 다른 도형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둥근 원만이 그가 아는 세계의 전부였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동그라미를 그렸을까... 모든 힘과 정성을 동그라미를 그리는데 다 쏟아부은 그도 이제는 힘이 조금씩 없어지기 시작했다. 한치의 오차도 없던 원은 조금씩 삐뚤어지기 시작했고, 하루에도 수백 개씩 그려나가던 원은 이제 10개도 그리기 힘들었다.
어느 날, 모든 힘을 쥐어짜 낸 그는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젊을 때 그랬던 것처럼 삐뚤어지면 다시 지우고 완벽한 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그의 마지막 동그라미가 완성되자, 그는 그 동그라미 안에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마치 그곳이 자기의 무덤인 것처럼, 그는 동그라미 안에서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숨을 쉬었다.
그의 마지막 숨은 그가 그린 동그라미 안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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