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즈 모임] '동그라미'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

소재는 동그라미

권호 기자

작성 2019.12.13 23:13 수정 2020.02.20 21:30
<출처: unsplash>




[뮤즈: 전진우 작가]


<동그라미>


동그라미

차가운 눈물
투명한 하늘색
콘택트렌즈가 지상으로 떨어진다 

오리의 수많은 깃털들이 
소용돌이치다가 잠잠해진다 

차가운 수면 

나뭇잎 한 장 

그 위에 떨어지면

무지개는 상공에 위치한다

주머니 속 숨 쉬는 나의 나침반




[뮤즈: 유피린 작가]


<계포일낙>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것에 있어서 누군가의 허락 또는 허가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 허락이나 허가는 쉽게 나오기도 하지만 어쩔 때는 매우 어렵게 떨어진다.
“이제 슬슬 졸업 논문을 쓰려고 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슬슬 너희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하려고.”
부장인 사윤의 말에 축제 분위기였던 동아리실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제 막 신입 딱지를 뗐다고 할 수 있는 리애, 시은, 신우, 연성에게 있어서 부장인 사윤의 말은 그만큼 충격이었으니까.
찬성하는 사람 따위는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새내기인 4명에게 있어서 부장인 사윤의 역할은 중요하니까. 하지만 말릴 수도 없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는 문제이니까.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요?”
“이번에 보니까 잘하던데 뭘. 이렇게 하면 되는 거지.”
사윤이 슬쩍 시선을 돌리며 동아리실 벽을 바라보자, 모두의 시선이 따라갔다. 그동안 우로보로스 클럽에서 쓴 작품들. 그 한가운데에 이번에 출품한 공모전에 입선된 상장과 모두가 쓴 작품이 한가운데에 붙어있었다.
우로보로스 클럽의 활동 내역을 보면 단순한 입상이 아닌 대상도 수두룩하게 있었기에 절대로 입상이 가장 눈에 띄는 한가운데를 차지하기에 초라한 실적이다.
하지만 그런 입상을 부장인 사윤이 당당하게 한가운데에 두었다. 새내기들은 말렸지만, 사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가 만든 동아리이니까 이 정도 독단은 다들 인정해줄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충격적인 사실을 던지며 사윤이 밀어붙이자, 다들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새내기인 4명과 다르게 사윤은 대학원생이다. 그것도 슬슬 박사논문을 써야 하는 선배.
거기에 우로보로스 클럽의 창립멤버이자, 초대 부장. 그런 사윤이 대학원생이 되어서 부장을 맡고 있는 이유는 한 가지.
사윤을 포함한 창립 멤버들이 졸업 등을 이유로 클럽을 떠나고서 급속도로 쇠퇴한 클럽의 명맥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다시 부장을 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가끔씩 찾아와 줄 거죠?”
“가능하다면, 그런데 지금처럼 같이 놀기는 힘들 것 같네.”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사윤을 보자, 다들 시선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저희는 아직 배울 것이 많은데요―?”
“……글은 배우는 것이 아니야. 같이 느끼는 거지.”
이들이 입상하기 위해서 작품을 쓰면서 사윤을 포함한 클럽의 올드 비들이 말했던 핵심을 말했지만, 다들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것이 없어서 느낄 것도 적은 데요?”
“우리도 그랬어. 하지만 스승을 만나기보다는 친구를 늘렸지.”
이미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확정한 사윤의 말에 다들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우로보로스 클럽에 들어와서 그들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사건을 겪었다. 특히 그 절정은 폐부 위기였을 것이다. 오랫동안 존재했고, 옛날에 실적이 있었다고 하지만, 최근의 활동이 없어서 폐부 위기에 몰렸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폐부를 막기 위해서 공모전을 노렸고, 대상은 아니지만 입상하는데 성공함으로 폐부를 막아내었다.
그걸 본 사윤이 ‘이제 다시 원래 궤도로 돌아온 기분이다.’라고 했었는데, 설마 은퇴를 결심했을 줄은 생각도 못했던 그들이다.
“창작, 아니 무언가를 시도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어. 그게 뭐라고 생각해?”
“일단 해보는 것이요?”
“그렇지. 봉황이라고 하여도 알 속에 있으면 이게 봉황인지 닭인지 알 수 없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사윤은 더 이상 알 속에 있는 병아리가 아닌 봉황이 될 수 있는 후배들의 작품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확실히 좋은 작품들. 자신과 다른 상상력이 돋보여서 감탄이 나온다. 우로보로스 클럽에서 본 작품 중에서 나쁜 작품은 없었다.
“선배. 그러면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응? 뭔데?”
한참의 시간을 보내서야 자신의 은퇴를 받아들인 후배들을 보는 사윤의 눈은 가라앉았다. 기대가 아니라, 예전에 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선배 다음의 부장을 정해주세요!’
초대 부장이었던 사윤이 대학원 진학을 위해 은퇴를 선언했을 때, 후배들이 부탁했던 한 마디.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 순간 이어진 동아리의 붕괴.
줄 세우기를 원하지 않더라도 무심코 순번을 정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그렇기에 사윤이 부장을 정한 순간. 알게 모르게 순번이 생겼다.
가장 잘 쓰니까 사윤이 부장으로 정했다.라는 확실치 않은 마음의 격차가 생긴 것이다.
그렇기에 사윤은 이번에도 그렇게 되는 것인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로보로스 클럽은 그런 순번과 격차를 위해 존재하는 동아리가 아니다.
누구든 1등이 될 수 있고, 꼴등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꼬리를 문 동그란 뱀을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
“……선배가 보기에 여기에서 가장 못 쓴 글을 뽑아주세요.”
동아리 벽에 걸려있는 모든 작품을 가리키며 말하자, 사윤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봤을 때 모두 잘 쓴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어서요.”
“……어째서?”
“반면교사로 삼으려고요.”
부장을 뽑아달라는 말이 아니었기에 사윤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뚫어지게 모든 작품을 훑어보다가 하나의 작품을 골랐다.
우로보로스 클럽 초창기에 사윤이 공모전에 출품해서 대상을 받은 작품이었다.
“그러면 역시 이거 일려나?”
당시에는 열심히 썼지만, 지금 보면 미숙함 밖에 안 보이는 자신의 글을 뽑자, 다들 걸려들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들었지? 저게 선배 본심이야. 모두 잘 썼다고 하지만 자신의 대상 작품 이하는 아예 미달이라고.”
“역시 전부 내숭이었어.”
“아니, 잠깐 그런 것이 아니라. 이건 생각보다 문제가 많은……”
어딜 봐도 놀리는 후배들의 말이었지만, 사윤은 꽤나 진지하게 모두를 달래려고 허둥거렸다.
그리고 그런 광경을 카메라의 랜즈를 통해서 보고 있던 창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OK 컷!”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들어 올린 창민의 외침에 모두들 길게 참았던 숨을 토해내었다.
만족한다는 창민의 목소리에 허둥거리던 사윤도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가장 기다리던 허가가 떨어졌다.




[뮤즈: 휘게 작가]

 

<느긋함>

눈을 뜨면

아무 생각도 안 나, 멍하지


창밖 햇빛이 뜨거워지도록

누워서 움직이지 않지


시간은 계속 주문서를 갖고 와

6시 알람, 6시 30분 알람, 7시 알람, 7시 30분 알람


어떤 선택지도 결정하지 않아

그저 9시가 되든 10시가 되든

누워서 멍하지, 느긋하게




[뮤즈: 심규락 작가]


<매해 기온이 영하가 되면 생각나는> 

“어이, 기사 양반. 내가 그 얘기했나 모르겠네. 저, 저기 보이는 상가 건물 있지? 아이, 저기 말여 저어기! 내가 소싯적에눈 원래 저거서 유통 업체 하날 굴리고 있었단 말여. 전국의 오만가지 풀때기 절반 이상이 이 손, 요 봐 요 봐 요 손을 거쳐서 왔다 갔다 했다니까. 봄에는 나물, 가을부턴 주로 배추. 아, 김장해야쟤! 대한민국 밥상때기 우에 올라가는 채소는 내가 다 책임졌다 이 말이야. 허허, 그땐 그랬어. 그 풀내기로 우리 첫째 아둘내민 저어짝 평택에서 교사 허게 하고, 둘째는 혼수 남부럽지 않게 쫘악 해서 나름 번듯하게 해서 시집보내고, 그리고 우리 막내, 막내 녀석은 그 들어가기 힘들다는 농협에 들어갔다고. 연락은 되냐고? 에이 거거 참, 원래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도 못 들어봤어? 막말로 사망신고만 안 들으면 되지. 나눈 바라는 거 일절 없어, 그럼 그렇고말고. 아, 김장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우리 막내가 어렸을 작에 김장철 배추만 보면 그리 좋아서 환장해버렸다고. 그 고갱이라고 들어봤재? 아유 모르긴 왜 몰라, 그 배추 속보면 중간 즈음에 노렇고 작은 어린잎 있잖어. 고소하면서도 단 거. 으이 고거 고거. 막내가 그걸 그렇게 좋아했다고. 요 막걸리랑 같이 먹으면 그것만큼 맛난 게 또 없다 이 말이야. 이 정도면 내가 배추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겠어, 모르겠어? 그러니까 기사 양반, 요 청량리역 앞서, 버려진 배춧잎 덮고 자던 나를 당신 트럭에 깔려 죽게 해도 나눈 크게 원망하지 않구먼. 어째 보면 호상이야 호상, 허허. 짜피 누울 집도 없었는데, 이 배춧잎과 막걸릴 들고 저짝 하늘에 있는 새 집으로 이사 가는 거 아녀? 저 위에서라면, 우리 자식들 잘 살고 있는 게 훤히 잘 보이겄구만, 낄낄. 암튼 젊은 양반, 고생혀. 겨울이라 운전할 때 눈길 조심혀고. 이이 알겄지? 아이 참내, 울지 말고 가던 길 조심히 가. 이제 모두 갈 길 가자고. 난 이제 머리 위에 그 동그런 원반 하나 이고 간다고, 음음.”




[뮤즈: FYDFYD 작가]


<동글 뱅글>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돌아왔다.’와 ‘돌아와버렸다.’는 그려놓으면 모양새는 같은데, 주체가 다르다.

내가 지금 딱 그렇다. 돌아왔으면서 돌아와버렸다. 나는 다시 나로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와버린 것이기도 하다. 바라던 것이면서도 예상치 못했다. 이런 내 상황을 누군가 알아줬으면 싶다가도 이내 밀려오는 피곤함에 그만둔다.

힘을 주어 시작했던 획의 처음이 끝으로 갈수록 힘이 빠진다. 끝내 맺음 없이 스러지듯 사라진다. 이젠 어디가 시작이었는지 맺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시작에 서있는 걸까, 맺음에 서있는 걸까. 답을 알고 싶다가도 이내 또다시 밀려오는 피곤함에 그만둔다.

처음 마음과 같은 길을 가겠다고 자신 있게 시작했지만, 묘하게 다른 곳을 걷고 있다. 발자국을 따라 천천히 걷는 게 아니라 발자국을 보며 뛰고 있어서 그럴까. 내 발자국이 어디에 찍혔는지 볼 새도 없었는데, 뒤돌아보니 내가 남기려던 발자국은 선명하지 않았다. 군데군데 끊기고 보이지 않는다.

이쯤 되면 한번 점검해보라고 한다. 잉크가 없던 걸까? 펜촉이 문제가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왜 종이는 생각하지 않나? 그리는 펜이 문제라고만 느껴지는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뮤즈: 장윤재 작가]


관 속의 관속의 관

부드러운 어둠 속

끝에서 시작으로


앙상한 몸에

품이 큰 정장 한 벌

"And now the end is near

and so I face the final curtain"


이제는 허물을 벗고

거울을 향해 여유 있는 커튼콜


상승하는 것을

눈물이라 부를 수만은 없기에


희뿌얘진 눈으로

작아지는 원을 바라보며


The end


2019. 1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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