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즈 모임] '화분'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

소재는 화분

권호 기자

작성 2020.01.23 22:34 수정 2020.02.20 21:27

<출처: unsplash>




[뮤즈: 송진우 작가]


<화분>

대부분의 민족에서, 농장에 방문하는 날이면 자신의 팔에 문신을 새기는 행위를 전통처럼 여기고 있다. 문신 이전에는 일종의 보조도구를 챙겨 입었는데, 이는 농사를 위한 데이터와 상호작용 하기 위해서였다. 과거의 이 도구는 결국 과학의 발전에 도움을 받아 단점을 극복하고 신체와 일체화되기에 이르렀다.

문신술 중 가장 최근에 개발된 기술은 나노-타투잉(Nano-tattooing)이라는 것이다. 나노-타투란 피부의 진피층과 상피층 사이에 이식된 아주 작은 마이크로칩들을 일컫는 단어이다. 이 칩들은 땀샘의 추골엽신경절을 통해 신경 체계에 연결되어 있으며, 농작물의 포트와 상호작용하여 작동한다. 작동 상태에 있는 칩들은 다양한 색깔을 띠게 되며, 이로 인해 팔에는 일종의 패턴이 그려지게 된다.

약 120년 전에 상용화된 나노 문신 기술은 지금까지도 농업 사회를 폭풍처럼 휩쓸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다른 분야들에서도 나노 문신이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해당 전통은 거의 농업사회에서만 시행되고 있다.




[뮤즈: Estela 작가]


깊은 밤 달은 흐르고
바닷마을에는 흰 눈이 쌓입니다

연인만이 깨어있는 밤

하얀 맨발로 
서로의 밤을 걸어요

마르지 않을 파도소리를 들어요 

별들도 숨죽인 
흰 눈만 사박사박 내리는
깊은 밤, 달은 흐릅니다




[뮤즈: Bee 작가]


<고학력자의 윤택한 삶>


있는 것

▣ 스페인 어느 수도원에서 만들었다는 장미 향 미스트

▣ 얼굴부터 발끝까지 모두 바를 수 있다는 무향 로션

▣ 글로벌 시대 아동의 이중언어 발달에 대한 두툼한 개론서

▣ 언어학의 모든 분야를 총망라한 얇은 개론서

▣ 뚜껑이 처음 열린지 일주일이 조금 넘은 500ml 생수

▣ 연말 모임에 가려고 산 올해만 신고 버려질 긴 검은색 스웨이드 삭스부츠

▣ 굽을 한 번 간 어디에나 대충 신기 좋은 검은색 인조가죽 앵클부츠

▣ 첫눈에 반해 산 밤에 편의점에 갈 때 매일 신는 하늘색 스웨이드 플랫슈즈

▣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두 개 오천 원짜리 길게 늘어지는 펜던트가 달린 은침 귀걸이

▣ 가로수길 구성의 버킷햇

▣ 버건디 색 아이섀도와 잘 어울리는 색깔의 매트 립스틱

▣ 격주로 사는 보라색 연두색 파란색 혹은 다른 색 라이터

▣ 여행용 렌즈 보존액 세 개


없는 것

□ 피부 자극이 적은 가향 바디워시

□ 언어학의 모든 분야를 총망라한 두툼한 개론서

□ 배탈 날 걱정 없이 마실 수 있는 물

□ 침대 옆에 두고 중간중간 코를 풀기 위한 갑 티슈

□ 붉은 매트 립스틱과 잘 어울릴 만한 발색력 좋은 아이섀도

□ 마음이 편안해지게 만들어 줄 넉넉한 용량의 렌즈 보존액

□ 더러워진 방바닥부터 창틀까지 아무 데나 닦을 수 있는 물티슈


사야 할 것

□ 캐나다 어느 곳에서 만들었다는 제비꽃 향 가벼운 미스트

□ 향수를 사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어 줄 바디 로션

□ 트렌디하지만 머리가 아프지 않을 만한 향수

□ 방학 중 매일 신을 만한 무난한 높은 굽의 미들힐 삭스부츠

□ 한번 보아도 눈길이 갈 만한 테슬 달린 로퍼

□ 버건디 색 아이섀도와 잘 어울리는 색깔의 촉촉한 립 틴트

□ 분홍색 보라색 혹은 다른 색 라이터

□ 이태원 구석의 와치 캡

□ 여행용 칫솔치약세트




[뮤즈: 김명철 작가]


<씨앗과의 대화>

흙에 숨어
다른 씨앗과 닿을 수 없는 너가
너무 가엽다
병든 꽃을 피워 꽃으로만 
마음을 나누려는 너가
너무 가엽다

나는 묻는다 
닿지 못하는 거짓으로만 마음을 나누면,
사랑받기 위해 사랑한다고 떠들면,
외롭지 않느냐고

씨앗이 답한다
살이 찢기며 꽃을 피웠는데도
너무 외롭다고
이렇게 병들지 모르고 피웠는데
너무 괴롭다고

나는 괜찮냐고 물었다 
내 안의 씨앗이 답했다
나도 진심이고 싶다고, 닿고 싶다고,
이젠 고맙다고 웃어주는 이들에게
그만 부끄럽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미안하다고




[뮤즈: FYDFYD 작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가 생각나요.>


처음에 당신을 만났을 때가 생각이 나요.

그 작고 앙증맞은 손으로 나의 손을 쓰다듬었을 때.
가누기조차 어려운 팔로 나를 꼭 끌어안았을 때.

나보다도 작은 당신이 나에게 아장아장 걸어오는 그 모습이.
까만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나의 손끝을 바라보는 그 모습이.

어느덧 이제는 나만큼이나 훌쩍 커서는
아침이면 기지개를 켜고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오는 당신을 보고 있노라면

당신은 햇살처럼 빛나요.
따뜻한 황금빛이 나를 감싸듯이
당신의 미소가 흐드러지게 빛나요.

이토록 사랑스러운 당신이
어느 날 말도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쓸쓸한 팔도 두 다리를 꼭 끌어안고 허공을 볼 때면

그런 당신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파요. 너무 아파요.
내 팔다리가 찢겨나가는 것 같아요.
내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아요.

나는 늘 그 자리에 있고
나는 늘 당신을 바라보고 있어도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다려주는 것 말고는
그저 묵묵히 바라보는 것 말고는
당신이 이기길 기도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래도 잊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내가 곁에 있다는 걸 알아줘서 고마워요

내일은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주세요.



※ 다음은 '화분'이 주제가 아닌 자유롭게 쓴 글입니다.


“지치고 스트레스받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성과도 나빠질 거예요.”

한 마디, 한 마디를 뱉을 때마다 단전에 힘이 들어간다. 조금 더 바른 자세로, 조금 더 곧은 목소리로, 또박또박하게 말을 한다.

“방해받기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업무 집중도가 떨어질 거예요.”
“회사를 오래 못 다닐 거예요.”

마디마디를 뱉을 때마다 ‘혹여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하는 말이 알아듣기 어렵거나 집중을 흐트러트리면 어떡하지.’, ‘목소리가 갈라졌나?’, ‘잘 되고 있는 게 맞나.’하는 생각들이 끊임없이 들었다.

“불만이 쌓이고 생산성도 낮아질 거예요.”
“갈등이 생기면 다투거나 문제가 생기기 쉬워요.”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현기증이 난다. 입은 마르고 발음도 꼬여간다. 숨은 계속 가빠지고 나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피곤해서 이직하거나 다퉈요.”
“피곤해서 이직하거나 다퉈요.”
“피곤해서 이직하거나 다퉈요.”

앉아있는 의자는 분명 소파였었지만 점점 딱딱해졌고, 등은 계속 간지러웠다. 오른쪽 손목은 눌려오고 이따금씩 참지 못해 떼었다가도 무거워서 다시 내려놓게 되었다. 머리 위의 등도 그저 그 역할을 다하는 것뿐인데도 불편하기 그지없다. 목소리에 힘이 빠져간다. 그래도 손목은 눌렸다 풀어졌다를 반복하고, 머리 위 등은 내가 자리를 떠날 때까지 불편했다.

그렇게 아흔두 마디를 더 하고는 기지개를 펼 수 있었다.




[뮤즈: 심스 작가]


<선인장이 죽었다.>

몇 년 전, 취업 기념으로 여자친구에게서 받은 작은 선인장 화분.
사무실 책상 위에 얹어놓기 딱 안성맞춤인 화분이었다.
각종 서류들과 사무용품들로 난장판인 책상 위에서, 오직 그 화분만이 고요하고 편안했다.

온갖 기쁨과 좌절을 함께했던 그 화분은, 하지만 더 이상 자라지도 않고 작아지지도 않았다.
봄여름가을겨울, 밖의 풍경이 아무리 변해도 선인장 화분은 처음 그 모습 그대로 거기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그 화분에 싫증이 나서였을까, 아니면 나와 여자친구와의 사이가 조금씩 멀어져서였을까... 물을 언제 마지막으로 주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즈음, 죽이는 게 더 힘들다던 선인장도 조금씩 말라가기 시작했다.

내일은 물을 좀 줘야지, 내일은 물을 좀 줘야지... 생각만 하면서 훌쩍 지나버린 몇 달의 시간. 녹색의 선인장은 어느새 갈색으로 변했고, 가시들은 아주 작은 바람에도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화분에 갇힌 선인장은, 도무지 물이 있는 곳으로 뿌리를 뻗지 못하도록 꽁꽁 갇혀버린 선인장은, 결국 아무도 모르게 그 생을 마치고 말았다.

결국 죽어버린 선인장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그녀와의 추억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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